
2008년 초 브롱스 여행기는 필자가 이제껏 보고 듣고 즐기며 행해왔던 힙합을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는 값진 깨달음의 시간이었다. 적어도 올드스쿨(Oldschool) 삼촌들과 함께한 시간을 통해 그들이 음악을 대하는 자세와 어린아이와 같은 마음가짐으로 문화를 즐기는 천진난만한 열정을 바라보며, 다시금 자신을 돌아보고 반성하는 계기가 된 셈이다. 진정으로 ‘B-BOY(브레이크 소년 혹은 브롱스 소년)’의 정의에 대한 재발견의 시간이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이렇게 영감 가득한 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필자로선, 리버스 크루를 비롯하여 절친한 동생인 챠닉(Chanyc)군에게 여행을 통해 얻은 영감들을 나누어주며, 우리가 대표하는 서울에서 브랜드 뉴 올드스쿨(Brand New Oldschool) 움직임을 이끌어보고 싶다는 이야기를 털어놓게 되었다. 우리만의 문화를 우리만의 결과물로 보여주자는 게 우리의 궁극적 목표, 다시 말해서 필자는 슈퍼맨 아이비(Superman Ivy)의 [YES YES Y’ALL] 싱글을 통해 ‘브랜드 뉴 올드스쿨’을 차근차근히 전파하는 것이고, 파트너 챠닉은 우리 주변을 둘러싼 ‘브랜드 뉴 올드스쿨 라이프 스타일’을 렌즈에 담는 것이다. 비록, 시작은 잔잔하겠지만, 색감만큼은 농후한 우리 움직임을 전해주자는 비교적 아담한 계획으로부터 모든 게 시작되었다. 비단 우릴 단번에 이해할 수는 없겠다만, 처음부터 욕심을 내고픈 마음은 추호도 없었다. 당시 사람들이 쉽게 접근하고, 자연스럽게 함께 어울리며, 부담 없이 즐기다 갈 수 있는 즐겁고 흥미로운 행사를 만드는 것에 최우선을 두고, ‘브랜드 뉴 올드스쿨’이라는 문화가 대한민국 힙합 커뮤니티 안에서도 더 이상 생소하지 않은, 다시 말해 사람들과 충분한 이해관계를 형성하는 것이 더욱 중요하다는 것을 자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가 어울리며 즐기는 모습을 가장 자연스러운 형태로 나누어주고 싶었다.
그리하여 1차적인 청사진을 그릴 수 있게 되었다. 말 그대로, 슈퍼맨 아이비의 [YES YES Y’ALL] 앨범 ‘Full Experience(체험기)’ 및 ‘Chanyc’s Korean Hip-Hop Photography(챠닉의 한국 힙합 포토그래피)’ 전시회, 우리의 뜻을 온전히 전달하기 위해선 섣부른 행동들은 금물, 최대한 땀 냄새로 범벅이 된 문화 체험 행사를 만들기 위해 올드스쿨 관련 서적 및 다큐 자료들을 반복 답습하며, 고스란히 우리의 것이 될 때까지 스스로를 훈련시키곤 했다. 돌이켜보면, 복잡 다양했던 과정들이었지만, 우린 체계적으로 한 단계씩 잘 풀어나간 것 같다.
행사 포스터 작업서부터, 베뉴 섭외 및 이벤트 스케줄까지, 여느 힙합 이벤트들과는 다르게 힙합 전체를 아우르는 행사를 해내야겠다는 생각이 번쩍, 뿔뿔이 흩어져 있는 길거리 요소들(street culture elements)을 한데 모으고, 모두가 한데 어우러져 즐길 수 있는 시간이 절실히 필요함을 느꼈다. 각자의 방식대로 힙합을 표현하며, 나누고 배울 수 있는 공간, 즉, 서로의 힙합을 자연스럽게 알아가며 이해하고 배우는 시간이 생기게 되면, 즐겁겠다는 생각에 구(oldschool)식 꿈과 사랑을 키워 나간 것이다. 어쩌면, 그것이 브롱스 여행을 통해 얻은 깨달음이었다. 비록, ‘조 콘조(Joe Conzo)의 북 사인회’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자리를 다녀왔지만, 그 공간은 어쩌면, ‘서울 시티 락커스(Seoul City Rockers)’가 원했던 궁극적 목표의 축소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번뜩인 것이다. 그리하여, 언제나 마음이 열려 있는 챠닉군과 함께 ‘Seoul City Rockers’의 초읽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절대 순조롭지 않았다. 행사의 이름을 정하는 것에서부터 난관에 부딪힌 것이다. ‘Seoul City Rockers’의 초기 이름은 ‘Oldschool Night(올드스쿨 나이트).’ 고백컨대, 필자를 비롯한 주위 형제들끼리 종종 필자의 집에 모여, 올드스쿨 자료들을 공유하며, 밤을 지새우곤 했던 나름 비밀모임의 코드이었기에 더욱 포괄적인 의미를 내포하는 이름을 이끌어내야만 했다.
‘Oldschool Night’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싶었던 가장 큰 이유는 ‘올드스쿨’ 문화를 아끼는 친구들이 정기적으로 모여 나누었던 에너지를 더 많은 사람들과 나누기 위함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Oldschool Night’이란 이름으로는 더욱 많은 사람들에게 다가가기엔 부적합했다. ‘올드스쿨’ 이라는 명사서부터 이미 한 시대를 풍미한 지나간 과거로만 비추어질 우려가 있었고, ‘나이트’는 말 그대로 청소년층에겐 적합하지 않은 용어로 오해를 살 여지가 다분했기에 새로운 이름을 찾아야만 했다.
궁극적으로, 필자가 살아가고 있는 동네 전체를 한데 모으고 모두가 자부심을 품을 수 있는 이름을 짓고 싶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전설적인 그래피티 다큐멘터리인 [스타일 워즈(Style Wars)]에서 해답을 찾게 되었다. 바로, ‘락(Rock)’이었다. ‘락’이라는 단어가 주는 일반적인 이미지는 락 장르에 국한된 뜻으로 오인하기 쉬웠지만, 힙합 문화 속에서도 오랜 시간 심심찮게 쓰였음을 알고 있을 것이다. 필자는 그 ‘락’이라는 단어를 통하여 모두가 공유하는 공통분모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스타일 워즈]에서도 나오듯이 디제이들은 잼(jam)을 ‘락’하며, MC들은 MIC를 ‘락’하고, 비보이들은 무대(floor)를 ‘락’하며, 그래피티 아티스트들은 도시 전체에 이름을 새기며 도시를 ‘락’하는 것이다. 빙고! 이것이야 말로, 힙합의 시작이며 힙합의 가장 원초적인 모습이고, ‘락’의 참뜻이라고 믿고 있기에, 주저하지 않고 필자가 대표하는 도시, 서울과 결합시켜 ‘서울 시티 락커스’라는 이름을 탄생시키게 되었다.
‘서울 시티 락커스’라는 이름을 가지게 된 이후, 언급할 때마다 왠지 모르게 거대한 기운이 담겨 있음을 느꼈다. 다시 말해서 그 이름이 지닌 무게감을 감당하려면, 누구보다 더 열심히 연구하고 분발해야겠다는 생각이 절실했다. 거대한 움직임인 만큼 앞으로 짊어져야 할 책임의식의 무게에 짓눌리지 않고 꾸준히 걸어가기 위해선 마음을 단단히 먹고 매일 무장 행군하듯 챠닉과 ‘서울 시티 락커스’를 위해 혼신을 다하기로 한 것이다. 정말이지 3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준비에 역력했다. 그만큼 우리가 좋아하는 ‘브랜드 뉴 올드스쿨’ 문화에 대한 애착과 믿음이 있었던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다. 주변 지인들 역시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리버스 크루 스튜디오에서 숱한 밤을 지새우며, 올드스쿨 다큐멘터리들을 우리말로 번역 및 자막처리 작업을 하는 모습을 보며, 형제들이 격려와 안쓰러움을 동시에 보냈으니 말이다. 챠닉군 역시 이중고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당시 공익 근무 중이였기에 매주 서로가 각자의 역할분담을 통하여 자신에게 주어진 미션을 완수하고 주말엔 필자의 집에 머물며 서로가 준비해온 것들을 조합하며 영양 가득한 밥 상을 준비해나간 것이다. 우리의 움직임을 널리 알리기 위해선, 서울이 하나가 되어야 함을 이해하고 있기에 서울을 대표하는 아티스트들을 한 분 한 분 찾아뵙고, 그들에게 우리의 취지를 알리며 움직임에 동참하기를 설득했다. 날이 지날수록 움직임에 동참하는 가족의 수는 늘어났고, 심지어 의혹을 제기했던 사람들조차 뒤늦게 우리의 진심을 깨달았는지 언제든지 손을 내밀어 주는 흐뭇한 사례들도 많았다. 반면에, 가장 가까이 있던 손위 형제들의 무관심은 여전히 아쉬움으로 남지만, 어찌 되었든 우린 멈추지 않았다.
접근법에 있어서 가장 고전적인 방법들을 택했고, 그 방법들을 이행함으로써 우린 뿌리에 가장 근접한 움직임들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가령, 포스터 이미지 작업에 있어선 올드스쿨 플라이어의 황태자로 불리는 버디 에스콰이어(Buddy Esquire)의 모자이크 형식을 도입했고, 텍스트에 있어서도 올드스쿨 관련 용어만을 사용하는 고집을 선호했으며, 플라이어 및 게릴라 문서를 제작, 배포함에 있어 소속감에 대한 자긍심을 부여하는 것을 빼놓지 않았다. 3일간으로 펼쳐질 대장정의 올드스쿨 페스티벌 프로그램은 다양하게 준비되었고, 이중 가장 힘이 실린 날은 단연 첫째 날, 미국에서 뵙게 된 조 콘조와 살아있는 올드스쿨 포토그래퍼 서적 ‘Back In The Days’의 자멜 샤베즈(Jamel Shabazz), 그리고 살아있는 전설적인 오리지널 비보이 크루 락 스테디 크루(Rock Steady Crew)의 오리지널 멤버이자 세븐 그랜드 마스터즈(7 GEMS)의 켄 스위프트(Ken Swift)가 올드스쿨의 산 증인으로서 함께하는 꿈 같은 일을 해내게 된 것이다.

무모한 프로젝트를 배짱 있게 해냈던 거 같다. 행사 3일 내내 입장도 무료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에게 돈을 버는 건 중요치 않았다. 사람들과 소통에 얼마나 목말라 있었는지 이제 조금이나마 실감이 될까? ‘서울 시티 락커스’가 ‘브랜드 뉴 올드스쿨’을 추구하는 친구들을 알리는데 최소한의 보탬이 되었다면, 그것만으로도 더할 나위 없이 좋았으니 말이다. 그렇기 때문에 몇 개월 동안 음악작업 한번 제대로 하지 못했던 건 그다지 상처로 돌아오지 않았다. 오히려 값진 경험을 스스로 만들게 되었으니 말이다. 이번 기회를 통하여 필자의 움직임을 온전히 이해시키고 앞으로 함께 즐길 수만 있다면, 그때가 되어서 음악작업을 시작한다 한들, 때늦지 않으니 말이다.
긴 얘기를 간추려 얘기하자면, 브롱스를 다녀온 몇 개월 후, ‘서울 시티 락커스’가 탄생하게 되었고, 꿈 같은 쾌거를 이루게 되었다. 전설적인 삼촌들을 모신 가운데, 그들이 걸어온 위대한 순간들을 한국 친구들에게 생생히 들려줌으로써, 우리 맘속에 담아두었던 의심들을 잠재우고 다시금 믿음을 부여하는 좋은 계기가 되었다고 확신한다.
그에 더해, 행사 당일 날, 샤베즈 삼촌께서 우리들의 모습을 촬영함으로써 앞으로 출판될 새로운 서적을 꼭 확인해주길 바란다는 사려 깊은 말씀에 가슴 벅찬 감동을 안겨주기도 했으니, 꿈보다 좋은 시간들이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형님들과 함께 보낸 첫째 날은 대성공이었다. 삼촌들께서는 늦은 저녁식사 자리에서 이렇게 좋은 시간을 마련해준 챠닉군과 필자에게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 실로 몸 둘 바를 몰랐다.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기뻤지만, 들뜬 마음을 추스르고 변함없이 공부하며 창작하고 나누며 즐겨야겠다는 더 굳은 다짐을 가슴에 새기며, 남은 이틀의 행사도 무사히 마치게 되었다. 모두가 함께 이뤄낸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그리고서 몇 개월이 지나게 되었다. 다가오는 11월, 힙합의 태동과 함께 사회문화적인 움직임을 이끄는 단체인 ‘UNIVERSAL ZULU NATION 35th ANNIVERSARY(유니버설 줄루 네이션 35주년 기념회)’가 있다는 소식을 접해 듣게 되었다. 사실 그 소식을 전해들은 순간서부터 바로 여행준비에 들어갔다. 챠닉군은 공익근무 와중에 알바까지 해야 했었고, 필자 역시도 ‘서울 시티 락커스’를 준비하느라 MC로서 충분한 활동을 하지 못하였기에, 떠나기 전까지 여러 공연을 통해 모습을 비추려고 노력했고, 그 공연들을 통해 비행기표를 구매할 수 있는 최소한의 비용을 마련하게 되었다. 시간은 다가왔고, 뉴욕행 비행기에 오르게 되었다. 다행히도 그곳 현지에 살고 있는 포토그래퍼 누님을 통해 브롱스에 거주하는 친구 집에 머물 수 있는 승낙을 얻게 되었고, 필자는 머물 수 있는 곳이 생겼다는 것만으로도 맘속의 큰 위안이 되었다. 까마득한 밤에 도착한 곳은 브롱스. 가히 브롱스답게 길거리는 아주 거칠었고, 위험이 느껴질 정도였다.

지난번에 머물게 되었던 기숙사와는 다르게, 이번 숙소는 ‘Real Deal(위험천만)’이였다. 일단 주위에 이렇다 할만한 구멍가게도 없었으며, 심지어 가로등도 듬성듬성 위치해 있었다. 우리가 머물게 된 집은 락 스테디 크루의 오리지널 멤버이자 줄루 킹즈(Zulu Kingz) 2세대인 밤 파이브(BOM 5)의 집이었다. 연세는 마흔을 훌쩍 넘으셨다지만, 그에게 있어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는 걸 여실 없이 증명해줬다. 그는 장난기 가득한 재미있는 분이셨다. 우린 금방 친해질 수 있었고, 첫날부터 파티에 놀러 나갔다.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도착한 당일, 오바마가 흑인으로서 미국 최초 대통령으로 당선된 날이었기 때문이다. 뉴욕 도착 전부터 비행기 안에선 이미 축제 분위기였고, 샌프란시스코에서 경유를 하고 온 우리로선 오바마 당선이 거의 확정 되었음을 알고 출발했기에, 뉴욕 분위기(민주당을 지지하는 주)는 어떨까 들뜬 마음으로 다시 비행기에 올라탔던 기억이 생생하기만 하다. 예상대로 온 도시는 피에스타. 그날의 코드명은 ‘오바마’였다. 그 단어 하나만으로 우린 그 어떤 뉴욕커와도 거리감 없이 껴안고 방방 뛸 수 있을 정도였으니 말이다. 우리가 파티하러 간 곳은 ‘수트라(Sutra)’라는 조그마한 라운지/클럽이었다. 입장을 위한 줄은 꽤 길었지만, 서두를 것이 없었다. 이미 밖에서부터 낯선 사람들과 자유의 공기를 마시며 도시와 파티를 즐기고 있었기에 어떤 것도 문제가 되지 않았다. 드디어 입장.
이게 웬걸, 그곳엔 이미 줄루 형제 자매들이 진을 치고 축하파티를 뜨겁게 벌이고 있었다. 줄루 중에서도 연세가 높은 어르신들께서 많이 계셨고, 그들을 만나는 건 필자로선 언제나 큰 영광이기에 한 분 한 분께 인사를 드리며 서울에서 조카가 놀러 왔음을 알렸다. 많은 사람들의 환호와 갈채 속에서 디제이가 교체되었다. 과연, 누구일까? 시선은 부스를 향하게 되었는데, 세상에 이런 뜻밖의 수확이 다 있을까? 퀘스트러브(?uestluv)의 플레이 타임이었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퀘스트러브의 타임은 원래 예정에 없었지만, 오바마 당선을 축하 하기 위해 뉴욕에 놀러 왔다가 프리 잼(Free Jam)을 열기로 했다는 것이다. 필자를 비롯한 챠닉군과 밤파이브, 그리고 줄루 O.G.(Original Gangsta의 줄임말)들과 함께 날이 깊어질 때까지 승리의 순간을 즐겼다. 퀘스트러브는 당시 발매를 앞둔 절친한 동료 큐팁(Q-Tip)의 신보를 신나게 홍보하며 ATCQ 클래식 믹스를 들려주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렇게 우린 클럽이 문을 닫기 전까지 올 나잇 파티를 즐기고, 아침밥을 먹고 귀가했다.

숙소로 돌아왔을 때 필자는 잠들기를 거부했다. 엇갈린 시차 때문에 잠도 오지 않았을뿐더러 늦게 낮에 일어나 하루를 출발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필자는 챠닉군을 잘 설득하고 앞으로 여행함에 있어 조금 지치고 힘들 수도 있겠지만, 최대한 잠을 아끼고 뉴욕의 순간들을 만끽하자고 단단히 일러두었다. 이미 떠나오기 전부터 어려운 결정을 통해 여행길에 올랐던 지라, 우린 샤워를 마치고 다시 길거리로 나섰다. 그리고 필자의 방식대로 찬희에게 뉴욕을 보여줬다. 다양한 곳에 데리고 갔다. 할렘(Harlem)에서부터 브루클린(Brooklyn), 퀸즈 브릿지(Queens Bridge), 자유의 여신상(Statue Of Liberty)까지, 우린 이곳저곳을 낭비 없이 누비고 다녔다. 그리고 드디어 ‘Zulu Anniversary(줄루 기념식)’ 시간이 다가왔다.
첫날 장소는 브롱스에 위치한 클럽이었다. 3일의 페스티발인테, 첫날 스케줄은 우리에게 매우 중요했다. 다시금 조 콘조삼촌을 뵙기로 기약한 날이었으며, 필자의 크루 줄루 킹즈 형제들을 만나기로 약속이 되어있던 날이었기 때문이다. 그날 역시도 도시를 디깅하며, 느지막이 기차에 올라타 행사장으로 향했다. 그런데 우리에게 안 좋은 습관 하나가 생기게 되었다. 며칠 밤 동안 무리를 해서인지 챠닉군과 필자는 지하철만 올라타면, 꾸벅 졸곤 했다. 그 딱딱한 자리조차 편안한 쿠션처럼 느껴질 정도였으니 우리의 행군 강도를 대략적으로 짐작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믿거나 말거나 우린 3일 밤을 브롱스 집에 귀가하지 않고 길거리서 보내기도 했다. 하룻밤은 브루클린 브리지에서, 하룻밤은 호텔계단에서, 하루는 자유의 여신상으로 향하는 선착장이 있는 배터리 공원(Battery Park)에서, 이렇게 장소를 불문하고 잠시라도 쉴 수 있는 곳이라면 마다하지 않고 휴식을 취했다.

어쨌든 그렇게 해서 유니버설 줄루네이션 35주년 기념식 1ST DAY에 도착하게 되었다. 생각보다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지만, 살아있는 전설들, 1세대 영웅들은 기념식에 출동하여 자리를 빛내주고 있었다. 아무래도 그들에겐 옛 추억을 회상할 수 있는 1년에 한번 있는 ‘Reunion’ 자리로 생각하며, 적절할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로 모두 오랜만에 만나는지 다들 서로 안부를 물어보기에 바빠 보였다.
줄루 킹즈는 자신들의 잔치에서 큰 삼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줄루 댄스로 시작하여 사이퍼(cypher)를 펼쳐나갔다. 그때 그 순간을 챠닉군이 사진에 잘 담아두었으니, 잘 감상하길 바란다. 그 이후로 여러 줄루 MC들의 공연이 펼쳐졌다. 대외적으로 많이 알려진 MC들은 아니지만, 그들은 그들만의 확고한 철학과 메시지가 있었고 단연 TV에서 나오는 음악과는 시작부터 다른 접근을 하고 있었다.
문안에 들어서자마자 조 콘조와 재회할 수 있었다. 어찌나 반갑던지, 이제 우린 제법 많이 친해졌음을 따뜻한 포옹을 통해 알 수 있었다. 어느 때보다 컨디션이 좋아 보이셨고, 한국을 다녀오신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인지, 아직도 한국에서 받은 뜨거운 사랑이 가슴속에 고스란히 남아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조 콘조는 베뉴를 돌아다니며, 많은 줄루 형제들에게 우리를 성심 성의껏 소개 시켜주셨다. 다행히도 모든 일이 순조롭게 풀리기 시작했고, 디제이, MC, 비보이, 비걸, 라이터들이 한데 어우러져 힙합을 즐기는 ‘서울 시티 락커스’보다 더 큰 감동과 전율을 느낄 만발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더 느끼고 싶었다. 그들의 ‘Peace(평화)’를 알고 싶었고, 그들의 ‘Unity(하나)’, 그들의 ‘Love(사랑)’, 그들의 ‘Having Fun(즐기자)’을 이해하고 싶었다.

사실 필요이상으로 넘쳐나는 질투와 시기 속에서 긍정적인 발전을 기대하기 어려운 곳에서 너무 오랜 시간을 보내와서 인지, 왠지 모르게 자유가 주어졌음에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는 느낌이 들어 처음엔 기분이 몹시 불쾌했음을 밝힌다. 챠닉군도 마찬가지였다. 둘 다 이건 사실이라고 믿기엔 ‘too good’이였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누군가를 축하하고 지지해주는 분위기, 그들의 눈빛과 가슴의 언어들의 진심은 피부로 다가왔다. 가슴에서 우러러 나오는 진실된 행동임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을 정도니까 말이다. 언제쯤이면, 우리도 평화를 되찾고 사람답게 음악하면서 진정으로 하나가 되어 이 문화를 즐길 수 있을지 미지수이지만, 그나마 필자가 만들어가는 움직임이 그 길로 향하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된다면, 필자는 그것만으로도 만족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도 품게 되었다. 사실상 이런 얘기를 꺼냄에 있어서도 어떠한 사람들에게 비현실적인 이상주의자의 이야기로 비추어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언급하기를 꺼렸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주위의 시선과 관계없이 필자의 믿음에 충실하기로 했기에, 가슴에 맺힌 말들을 서슴없이 고백하는 바이다. 사실 이렇게 편하게 필자의 속마음을 털어놓기까지 상당히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리 모두를 위한 움직임을 준비하면서도 가까운 형제들을 비롯하여 움직임을 이해하지 못한 무리 다수로부터 이유 없는 질타를 받아야만 했고, 심지어 가까운 형제들이 이유 없이 험담하고 다니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우리가 얼마나 온 힘을 다하여 마음을 다하여 준비했는지 알면서도 이유 없는 험담을 하며 다닌다는 생각이 가슴에 큰 상처로 남았지만, 그것이 한국힙합의 현주소이자 필자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이기에 마음을 더욱 독하게 먹기로 한 것이다. 이것에 관해선 챠닉군에게도 단단히 일러두었기에, 챠닉군도 마음을 단단히 다진 상태였다. 이미 필자는 많은 사람에게 실망하게 되었지만, 더 이상 그들이 우리를 가로 막거나 멈추게 할 수 없음을 알았다. 믿겨지지 않는 힙합 1세대들과 깊은 만남을 통해 우리의 믿음은 날로 깊어졌고 눈부시게 빠르게 성장해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가 멈출 수 없는 이유는 상대적으로 간단했다. 우리가 실제로 보고 느끼고 체험했던 진실의 순간들을 나누고 다 함께 성장하여 부디 즐거운 환경을 조성할 수 있을꺼라는 생각 때문일까? 책임의식을 지니게 된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운명이라고 받아드리고, 그 운명에 충실하기로 맘 먹었다. 그렇기에 필자가 눈을 감는 순간까지 많은 사람이 필자가 내놓은 결과물, 혹은 관심사나 움직임, 목표 등을 이해하지 못한다 한들, 그 언젠가 어느 한 사람이라도 느끼고 소통할 수만 있다면, 필사적으로 헌신한 필자의 흔적들이 결코 낭비로 돌아가지 않기를 바라며, 그날을 위해 계속 달릴 것이다.
스스로가 가야 할 길이 너무도 멀고, 더욱 더 깊은 깨달음이 필요함을 느낀다. 이제껏 필자가 행해왔던 모든 움직임들이 진실이었음을 증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진리를 최대한 많은 사람들과 공유하며 함께 즐기는 것이 최종목표이기에 멈출 수가 없다.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음반 소비문화서부터 공연문화까지 큰 개혁이 필요함을 느끼지만, 우선적으로 몸소 실천을 보이고 싶은 바람이다. 음반 구매를 ‘낭비’가 아닌 ‘투자’로 받아들이고 이런 결과물을 만들어준 아티스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갖출 줄 아는 멋쟁이들이 늘어나고 동시에 귀와 마음이 뜨임으로 인해 다양함을 인정하고 받아드리고 즐기는 멋쟁이들이 많이 늘어났으면 하는 바람이 오늘도 잠들 기색을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다음 편에 계속
기사작성 / RHYTHMER.NET JAZ(MC/Contribut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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